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문단 편집) == 건조내역 및 활동 == 이러한 도이칠란트급의 성공에 힘입어 독일 해군은 초기에는 군부의 재무장 시도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견제를 무릅쓰고, 이후 [[나치 독일|나치 정권]]의 집권 뒤에는 도이칠란트급이 상징하는 기술적 혁신에 반한 [[아돌프 히틀러]] 정권의 지원 하에 아트미랄 셰어(1934년 취역),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1936년 취역)를 연달아 건조하여 기존의 전노급전함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이 3척은 1935년 [[영국-독일 해군조약]] 체결로 독일 해군이 기존의 도이칠란트급보다 거대한 현대적 전함 건조를 국제조약을 통해 보장받게 될 때까지 독일 해군 최대최강의 전투함이었고, 역대함이 취역할 때마다 독일 해군 총기함으로 운용되었다. 실전에서도 이들은 [[독일 해군]]을 대표하는 함선으로 활약하였는데, 도이칠란트와 아트미랄 셰어는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 국민군을 지원하여 스페인 공화정부 측 해군의 전함 하이메 1세 등을 견제하면서 독일의 프랑코 군대에 대한 군수물자 수송 통로를 방어하였으며,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크릭스마리네의 기본 전략이었던 통상파괴전을 수행하였다. [[영국-독일 해군조약|영-독 해군조약]] 체결 이전의 독일 해군에서 도이칠란트급은 독일 해군이 합법적으로 보유 가능한 최강의 주력함으로서 자국 영해에서 외국 해군의 세력을 배제하는 것, 즉 [[전함]]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영-독 해군조약 체결로 제대로 된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되자 안 그래도 방어력도 화력도 부족한 도이칠란트급에게 제해임무를 맡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졌으므로, 도이칠란트급의 화력보다는 방어력 및 기동력 측면을 감안하여 원양에서의 통상파괴임무 수행에 돌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 이에는 당시 독일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에리히 레더]] 제독이 통상파괴작전에서 당시 잠수함 전단장 [[카를 되니츠]] 대령이 주장한 [[U보트]]의 가치를 낮게 보고 대형 고속 [[수상함]] 또는 대형 [[잠수함]]에 의한 호송선단 기습 및 단독항행 상선에 대한 합법적인 임검 및 나포-격침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인식했던 탓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후 도이칠란트급 3 척 중 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이미 바다에 나가 있던 그라프 슈페는 1939년 9월부터 자침하는 12월까지 [[대서양]]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제대로 된 통상파괴활동을 펼치는 독일 해군 함정으로 맹활약하였다. 당시만 해도 [[U보트]]는 제대로 대서양에 나가지도 못하는 상태였고, 아울러 독일 해군 역시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어 전과를 올리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게다가 전쟁이 터질 줄 몰라 배들을 미리 내보내 놓지도 않았고. 당대의 통상파괴전 관련 국제법은 철저하게 [[수상함]]을 위한 것이었고 [[잠수함]]에 의한 통상파괴작전은 아주 엄격한 여건 하[* 일단 정선 명령을 내린 뒤 명령에 불복하면 공격을하고, 항복하면 상선 승무윈을 모두 잠수함에 태운후 격침시키고 등등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였기에, 이 절차를 지켰던 건 2차 대전 초기 영국 해군 외에는 전무하다. 그도 그럴게 절차 자체가 잠수함의 특성을 개무시하고 설정되어서, 지키는놈은 바로 상어밥되는 수준의 어처구니 없는 절차다. 일단 정선명령을 하려면 부상을 하고 적함 군처로 가야하는데 잠수함 특성상 내압 선체가 유일한 장갑이다보니 정선명령을 듣고 상선용 무장까지 갈 필요도 없이 37밀 대전차포 한발만 맟춰도 그 잠수함은 죽은거다. 그냥 가속해서 들이 박기만 해도 그대로 격침후 승무원 몰살이니까. 항복해도 문제가 되는게 좁아 터져서 식랑보관할 곳도 모자라고 화장실 2개면 감격의 기도를 올려야하는 잠수함에서 적 승조원을 태울곳을 어떻게 만드는지.... 아니 그 이전에 적 승무원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뒤진다. 문자그대로 상선 승조원이 잠수함 승무원보다 많고 내압선채 깨지면 해저유적지가 되어버리는 잠수함인지라 군함 주제에 개인화기가 없다.] 에서만 국제법상 허가되고 있었다. 그라프 슈페는 1차대전 당시 당시 태평양 통상로를 들쑤신 [[SMS 엠덴]]의 신화를 다시 쓰고자 했다. 나머지 2척은 도이칠란트 함이 국가 이름인 "도이칠란트"라는 함명을 가진 배가 침몰할 경우 국민들에게 끼칠 악영향을 감안해서 뤼초(Lützow)로 개명한 후, 1940년 가을 이후부터 대서양에서 통상파괴작전에 임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1945년까지 살아남아 독일 항복 직전 공습으로 항구에서 침좌(아트미랄 셰어) 하거나 [[소련군]]에 노획되어 표적함으로 격침 처분(뤼초) 되는 운명을 맞았다. 문제는 해당 함을 건조한 것에 비하면 소득이 별로 없었다는 것. 그나마 멋지게 활약한 그라프 슈페함도 고작 상선 9척을 격침한 것에 불과했고, 나머지 두 척도 통상파괴작전에 나간 것은 몇 번도 안되었으며, 주로 [[동부전선]]의 독일 육군을 지원하는 포격에 종사하였다. [youtube(B4LCLg0GfEI)] >Graf Spee - Pocket Battleship Scuttled By Nazis Aka Graf Spee In Montevideo (c.1939 / [[파테|British Pathé]]) 그라프 슈페가 자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통상파괴전 도중 마주친 영국 해군 중순양함 1 척(엑세터)과 경순양함 2 척(에이잭스, 아킬레스)과 전투를 한 결과 중순양함에게는 중파의 손해를, 경순양함에는 소파의 손해를 입혔으나 교전 도중 입은 피해[* 결정적으로 중유를 예열해 액상화하는 장비가 파손되었다. 이걸 수리하지 못하면 항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를 수습하기 위해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Montevideo) 항구로 입항했다. 하지만 당시 중립국인 우루과이는 외교상의 문제로 장기 입항을 거절하고 국제법상 72 시간만 머무를 수 있었다. 몬테비데오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있는 항구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친독 국가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갈 수 있었지만 라플라타 강의 수심이 생각보다 얕았고 무엇보다 수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영국의 함대가 오고 있다는 잘못된 소식[* 이는 영국 측이 고의로 흘린 역정보였다. 아직 영국 함대가 집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라프 슈페가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를 흘린 것.]이 들어오면서 결국 1939년 12월 17일 승조원들을 하함시킨 뒤 자침한다. 이때 몬테비데오 항에선 독일 함선과 영국 함대의 전투가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퍼져 주민들이 전투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그라프 슈페의 승조원들은 종전 때까지 우루과이에 억류되었으나 소수는 탈출해서 친독 국가였던 아르헨티나 등으로 [[나치의 남미 도주|도주]]하기도 했다. 함장인 [[한스 랑스도르프]] 대령은 승조원과 함께 하함한 뒤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 Marine)기를 펼쳐놓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교전 때 전사한 승무원들은 몬테비데오 공동묘지에 매장했고, 랑스도르프 함장의 시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운구해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우루과이 정부는 2004년에 그라프 슈페 잔해 인양 작업에 들어갔지만[[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26735|#]] 2007년에 작업을 중단하였다. 이후 우루과이 해군이 침몰 지역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했는데, [[네오 나치]]들의 약탈과, 잔해가 운하로 들어가 손상을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민간회사가 인양한 함미장식 석재 [[국가수리]]상을 판매한다고 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고 실제로 네오 나치들이 사려고 하였다. 결국 우루과이 정부는 판매를 불허하고 국립 해양박물관에 보관 중이다.[[http://blog.naver.com/mirejet?Redirect=Log&logNo=110047515437|참고.]] 그 중에서 해결이 안되었던 '나치 청동 국가수리상'을 정부가 매각해야 한다고 판결내렸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0907481|#]] 최종적으로 정부 소유권이 되었으며, 수리상을 비둘기상으로 바꾼다.[[https://m.yna.co.kr/view/AKR20230617012800087?section=international/all|#]] 하지만, 유적를 파괴한다는 비판받고 비둘기상은 포기했다.[[https://m.yna.co.kr/view/AKR20230620003500087?section=international/all|#]] 셰어의 경우는 통상파괴 위주로 활동하며 남대서양과 인도양에서 10만톤 이상의 전과를 기록했다. 1942년 [[소련]]을 상대로 한 통상파괴작전이 [[쇄빙선]] 시비랴코프 1척에게 발각당해 격침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시비랴코프가 보낸 무전으로 통상파괴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저비스 베이 사건]]에 연루된 함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동부전선에서 독일 육군 지원 포격에 종사했으며 전쟁 말기 동프로이센 대탈출 당시 물밀듯이 밀려오는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는 독일 민간 수송선을 엄호했다. 셰어와 구축함이 호위하는 수송선들은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구축함 호위가 붙었음에도 소련 공군의 폭격으로 수만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1945년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항구에서 전복, 격침당했다.[* 한편 당시 같은 항구에 프린츠 오이겐도 있었는데, 오이겐은 공습을 피해서 살아남았다. 오이겐의 상당한 강운을 알 수 있는 부분.] 도이칠란트(뤼초)는 [[베저위붕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해안포대의 공격으로 파손을 입고 홀로 독일로 돌아가다가 영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함미가 동강나기 직전의 손상을 입고 간신히 돌아가 1 년간 수리와 개장을 거쳤다. [[바렌츠 해 해전]]에도 참가했으나 독일 해군의 소극적인 전술로 인해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대패를 지켜봐야만 했다. 도이칠란트(뤼초)가 후퇴한 이유는 간단한데, 포탄을 막을 장갑도 없는 판에 [[어뢰]]를 막을 수 있는 방어시설이 사실상 전무했으므로 어뢰 1방이 충분히 함에 치명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방어상의 문제로 인해 통상파괴활동 중 적 수송함대를 보고도 호위함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대로 도주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후 뤼초는 종전 직전 공습으로 항구에서 착저,[* 단 완전히 뒤집어져버린 셰어와는 다르게 주포탑 등 상부구조물은 계속 수면 위에 있었기에 5월 4일 탄약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소련군을 방어하기 위한 지원포격을 실시했다.] 격침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